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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기획총괄위원장, 전 동아일보기자



 



국의 대부분 도시가 청교도들의 희생 위에 건설된데 비해 로스엔젤리스(LA)는 히스패닉 문화권인 멕시코인들의 도시다. 16세기 초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정복하고서는 ‘포르시웅쿨라강에 있는 천사들의 여왕이 성모의 마을’이라는 긴 이름을 붙였으나 뒤이어 멕시코가 지배하면서 ‘천사들의 도시’로 간소화 했다가 1948년 미국 영토로 편입되면서 로스 엔젤레스(LA)로 정착했다. 


 LA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올베라 거리는 멕시코의 민속촌 같은 분위기다. LA의 아메리칸 원주민인 추마시 부족은 도토리를 주식으로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처럼 도토리의 텁텁한 탄닌 성분을 우려낸 다음 갈아서 죽을 쑤어 먹었던 것이다. LA중앙도서관의 책상과 걸상에 도토리 모양을 새겨둔 것은 원주민을 기억하자는 뜻이다.


             LA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할리우드 영화산업


 로스엔젤레스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 할리우드이다. 원래 영화산업은 뉴욕에서 출발했으나 1894년 토마스 에디슨이 영화 촬영기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한 후 특허료를 요구하자 영화인들은 특허료를 내지 않으면서도 날씨 관계로 언제든지 야외촬영이 가능한 서남부 캘리포니아로 멀리 이주해 갔다. 특히 이곳은 산과 바다, 사막, 강이 있어서 자연 자체가 세트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들이 처음 둥지를 튼 곳이 시원한 해안가 산타모니카였는데, 바닷바람에 필름이 상하고 촬영장비가 부식하는 현상이 나타나자 도심 안쪽으로 이전했던 것이다. 


 리 산(Mount Lee)의 할리우드 힐스에 있는 하얀색 사인 ‘HOLLYWOOD'는 글자 하나가 높이 14m, 폭이 9m나 되어 100리 밖에서도 잘 보일 정도로 영화산업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이것은 1923년에 부동산 회사가 분양목적으로 세운 야외 광고판이었으며 원래는 ‘할리우드 랜드’ 였다. 분양이 끝난 10여년 후 브로드웨이 출신의 무명 여배우가 자신의 촬영부분이 영화에 빠진데 실망하여 이 광고판 위에 올라가 자살한데다 ‘LAND' 글자가 무너져 내리자, 글자의 수가 13자여서 저주받았기 때문이라며 지금처럼 9자만 새롭게 도색해서 유지하게 된 것이다.


 할리우드 하면 화려하게 치장한 배우들이 빨강 카페트 위를 뽐내며 걸어가던 아카데미 시상식장이 떠오른다. 그런데 지난 번 방문했을 때는 행사장이 분명 필름회사의 코닥극장이었는데 이번에는 음향회사의 돌비극장으로 간판이 바뀌었다. 


 1888년 조지 이스트만은 유명 언어학자들을 초청, 세계 어느 지역 사람이나 똑 같이 발음할 수 있는 회사이름으로 코닥(Kodak)을 작명했다. 2천년대 초만 해도 종업원 14만명에 미국의 필름시장 90%, 카메라시장 85%를 차지했으며 한국이 수출 100억불 달성을 잔치할 때 회사매출 100억불을 자랑하던 코닥, 영화감독들이 코닥필름 사용을 조건으로 계약에 응했던 영화산업의 독보적 존재, 세계 최초로 디지털 사진기술을 개발하여 우리의 삼성과 엘지로부터 30억불의 로얄티를 받아갔던 다국적 기업 코닥이 눈앞의 수익성 좋은 필름시장에 연연하다가 디지털 세상 변화의 큰 흐름을 놓침으로써 파산하고 말았다. 


 “졸면 죽는다”는 군대용어가 치열한 기업 전쟁터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교훈 현장이었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신조어 ‘코닥 모먼트(Kodak Moment)'가 영어로 인정받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다니 불교서 말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절감했다. 


 일명 오스카상이라고도 하는 아카데미상은 3개의 유대인 영화사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가 합병하여 생긴 대형 영화사 MGM이 1927년부터 시상하기 시작했다. 비스듬히 누워있던 사자가 머리를 들면서 포효하는 모습의 트레이드 마크가 바로 MGM이다. 시상식장 안에는 수상연도와 작품의 이름이 기둥에 칸칸이 네온으로 새겨져 있는데 앞으로 2059년까지 빈 공간이 수상작을 기다리고 있다. 


  백인들의 잔치 아카데미상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작품상 등 4관왕을 차지


 아카데미상은 이제까지 미국 백인들의 잔치였는데, 2021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한국영화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국제영화상, 각본상 등 4관왕을 차지함으로써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이듬해에는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최초의 흑인 아카데미 수상자는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카렛의 하녀 매미역으로 나온 해티 맥다니엘이었으나 흑백 차별로 수상식장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녀는 유방암으로 죽어가면서 연예계 동료들이 영면하고 있는 할리우드 세미트리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으나 거절당한 채, 흑인 묘역인 로즈데일로 가야만 했다. 


그녀의 소원은 46년후 묘지 주인이 바뀌어 이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런가 하면 죽어서도 미녀 배우 곁에 가고 싶은 욕망을 주체 못하는 사내들도 있다. 마릴린 몬로가 묻혀 있는 웨스트우드 메모리얼 공원의 아파트식 묘지 바로 위 칸은 경매를 통해 57억원에 낙찰되었고, 그녀의 옆자리는 플레이보이 잡지 창간자 휴 해프너가 매입했다고 한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배우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인 필립 안이다. 도산선생은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보다 한 해 앞선 1902년 미국에 갔으니 최초의 이민자이자 재미교포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민 초기에는 오렌지 농장일을 했지만, 대한제국이 일본에 점령 당한 후에는 가족만 미국에 남기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서울과 상해를 분주히 오가는 기러기 아빠였다. LA에 있는 도산선생의 2층 가옥은 재미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이자 자신이 창립한 흥사단의 집합소였다. 1946년 인근에 있는 남가주대학(USC)의 캠퍼스 확장으로 도산선생의 집이 수용되자 USC한국동문들이 그 역사적 가치를 학교에 호소함으로써 학교 내 새로운 장소로 이전하여 이제는 ‘한국학연구소’ 로 보존되고 있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남 안필립


 도산선생은 “우리나라가 반드시 독립해서 일어서야 한다”는 뜻으로 아들 이름을 필립(必立)이라고 지었다. 필립은 미국서 태어난 최초의 교포 2세이자 시민권자 1호가 되었다. 그가 고교시절 무성영화 <바그다드 도둑>촬영장에 놀러 갔다가 젊은 동양인이 필요했던 영화사의 권유로 영화계에 발을 딛게 되었다. 형의 영향으로 두 남동생도 영화계에 진출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하고 단역에 그치고 말았다.


 필립안은 1936년 빙 크로스비 주연의 뮤지컬 <뭐든지 괜찮아, Anything Goes>를 시작으로 17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중국인과 일본인 역할이었지만 한국전쟁 중 이동외과병원을 다룬 영화 <배틀 서커스>에서는 진짜 한국인 연기를 했다. 1972년부터 4년 간 ABC 방송 TV시리즈 <쿵후>에서 마스터 칸이라는 중국무술 대가 역을 맡아 크게 인기를 얻어서 TV 최고상인 에미상을 받았다. 


필립안은 할리우드 ‘명성의 거리(Walk of Fame)'에 마련된 분홍빛 별 속에 이름을 새긴 최초의 동양인이다. 배우 안성기가 아들 이름을 필립이라고 똑 같이 지은 것은 그를 무척 존경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들어 무성 흑백영화가 유성 칼라로 바뀌고 대형 스펙타클 시스템이 나오면서 제작비가 엄청나게 늘어나자 많은 영화사들이 문을 닫고 헐리우드를 떠나버린다. 할리우드 거리에 분홍 별을 새기고 손과 발 자국을 남기게 된 것은 팬들과 관광객을 불러들이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였다. 


우리나라 명배우 안성기와 이병헌은 새로운 영화의 시사 및 개봉관인 차이니즈 극장 앞에 아시아 배우 최초로 손과 발자국을 남겼다. 중국의 우위썬(吳宇森)이 최초이기는 하지만 그는 감독으로서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핸드 프린팅은 시사회에 오던 여배우가 시멘트 양성중인 근처 공사장에 넘어져 손자국이 생기자 이를 기념하여 보관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황량해져 버린 할리우드를 지키며 다시 생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엉뚱하게도 사이비 종교 시비가 많은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 교회라고 할 수 있다. SF팬타지 소설가였던 론 허버드가 “인간은 외계인의 영혼이 윤회한 영적 존재”라면서 과학기술을 통한 정신치료를 강조하는 신흥종교를 1954년에 창시, 할리우드에 집중 포교하기 시작했다. 홍보효과를 위해 데미 무어, 샤론 스톤, 존 트라볼타 등 유명 연예인들을 포섭했으며 톰 크루즈는 이 종교에 반대하는 아내와 이혼할 정도로 열렬 신자이다. 


 사이언톨로지교는 대스타들이 살던 집을 구입하여 영화 입문생들의 숙소로 제공하면서 대본 읽기와 연기지도를 통해 꿈을 심어주었다. 종교라기 보다는 부동산 투자로 부를 창출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경찰서, 소방서, 상공회의소, 지방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할리우드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다. 


 LA의 랜드마크 건물은 2003년에 완공한 LA필하모닉의 전용공간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이라고 하겠다. 월트 디즈니의 미망인 릴리안 디즈니가 5천만 달러를 기증하고, 설계는 건축물이 관광명소가 되는 ‘빌바오 효과’의 창시자 프랭크 게리가 맡았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재료를 토대로 새로움을 창조하는 게리는 이 건물을 ‘건축의 기쁨을 노래한 송시’라고 자부심을 보였다. 


          LA의 랜드마크는 LA 필하모닉의 전용공간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그러나 범선의 돛 모양을 한 괴상한 건물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자 주변의 고급 이미지를 훼손한다며 주민들의 반발도 있었다. 프로펠라 같은 커다란 스테인리스 스틸 조각이 지나친 햇빛 반사를 일으켜 일부 소재를 변경했으며 내부는 릴리안의 이름을 기려 백합 무늬로 인테리어 장식을 했다. 6천여개의 파이프가 연결된 세계 최대 파이프 오르간을 갖춘 메인 홀은 객석이 공연무대를 둘러싸고 있다. 마치 음악을 싣고 여행을 떠나는 나룻배 모양이다. 


 월트 디즈니가 가난한 젊은 시절 교회 창고를 빌려 디자인 작업을 할 때 조그만 구멍으로 생쥐가 드나드는 걸 보고 ‘몰티머 마우스’라는 쥐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는 아내에게 쥐 캐릭터를 보이며 설명하자 릴리안이 ‘미키 마우스’라는 예쁜 이름으로 개명했는데, 이것이 대박을 터트린 것이다.


 흔히 브로드웨이라고 하면 뉴욕의 타임스퀘어를 연상하는데, 이는 큰 거리를 지칭하므로 대도시마다 있다. 브로드웨이가 뮤지컬의 대명사가 된 것은 대극장 공연 때 마차가 한꺼번에 몰려들어도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도로가 넓기 때문이다. LA의 브로드웨이는 대공황 이전까지 MGM, 워너브라더스, 파라마운트 등이 17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국가지정 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유명인들의 대저택이 있는 비버리힐스는 아무나 접근할 수 없기에 스타들의 집만 자동차로 지나가면서 안내하는 투어 코스가 있다. 물론 배우들의 자택만 표시된 지도를 팔기도 한다. 이곳 주민들은 많은 세금을 내면서 LA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치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근처에 있는 로데오 거리는 비버리 힐스에 거주하는 연예인들이 애용하는 명품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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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4-17 16: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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