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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한화솔루션 고문

- 현 학교법인 북일학원 이사장

- 산문집 ”시간 길어 올리기"

- 전 대한일보, 동아방송 기자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비엔나행 특급열차 이체(ICE)는 4시간이 다 되어 바이에른 주 동남쪽 파사우(Passau)역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오는 도시다. 도시 가운데로 흐르는 강의 물살이 세다. 인 강, 일츠 강이 만나 다뉴브강을 이루는 이 곳 세 물 머리의 강물은 여울 탓인지 박수치듯 신명난 소리를 내며 흐른다.


빠른 물살을 따라 조금 더 가면 오스트리아에 이른다. 버스를 타고 도시 한 쪽의 언덕, 요새로 올라갔다.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처음에는 감탄도 안 튀어 나왔다. 빼어났다. 뛰어난 대상, 특히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감각적 반응 중 아! 라는 탄성 말고 더 똑 부러진 표현은 없을 게다.


 “아!” 절경이다. 양쪽에서 갈라져 흘러오던 물줄기가 공원이 있는 강 가운데 삼각주의 꼭짓점으로 반듯하게 모인다. 파스텔 톤이나 핑크색의 나지막한 건물들은 가람과 섞여 감칠 맛 나는 아름다움을 꿰맞추고 있었다. 독일의 지성, 알렉산더 훔볼트가 이 곳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라고 했다는데 아마도 바로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 서서 그랬으려니. 


사람이 한 눈에 볼 수 있는 시야각(視野角)은 대개 200여 도는 된다지. 고개를 조금만 움직이면 더 넓어진다. 300도 가깝게 한 눈에 볼 수 있다. 한 눈에 들어오는 좋은 풍경을 한 폭의 동양화 같은, '그림 같은' 이라고들 한다. 가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아무리 재주 좋은 화가가 그려도 어찌 한 장의 그림에 빗대나 마뜩잖게 생각해 오고 있었는데 파사우의 풍경은 더 손 볼 데 없이 자연 스스로 그린, 파노라마 그림이다. 거기에 언덕 아래 펼쳐진 장관은 찾는 이들을 넋 놓게 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하고 있고. 


아! 는 한 번으로 족했다. 나만이 아니라 옆의 다른 구경꾼들도 조용한 것이 모두 블랙홀로 빠져 들었나 보다. 한창을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얼마를 보아야 하나. 눈에 더 담아 머리 속에 진하게 남기고 싶은데 꽉 찼다. 


 



#삼각주를 영어로는 델타(Delta), 그리스 문자 델타 Δ와 비슷해 그렇게 부른다. 물 가, 델타의 한 변(邊)에 있는 큼지막한 옛 소금창고 앞 벤치에 앉았다.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강물은 여느 강처럼 무심히 흘렀지만 그걸 보는 나도 섞여 강 풍경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순해지는 듯 했다. 아무리 시름이 많을지라도 물에 다 헹궈질 것 같다. 


바로 옆 벤치에 앉았던 동네 사람인 듯한 넉넉한 풍체의 아낙이 말을 걸었다. 서툰 영어를 오랜만에 써보고 싶었는지 어디서 왔느냐, 언제 왔고 구경은 어디를 했느냐, 유리박물관은 보았지? 쉴 새 없이 물어보는데 말씨가 따뜻했다. 바닥에 여러 가지 색칠을 한 골목길을 꼭 보라고 하더니 놓치지 말라며 한 성당을 일러주었다. 언덕부터 오른 거라 이제부터 골목길을 둘러 볼 참이었는데 잘 됐다. 


그녀의 말대로 무슨 표식인지 좁은 골목길에는 깔린 돌을 따라 여러 가지 색깔들이 띄엄띄엄 칠해져 있었다. 예술가 골목이라는데 호기심이 때도 안 가리고 극성을 떠는 게 내 품새지만 더러 궁금한 채로 두어도 좋지. 오늘은 위에서 본 풍경에서 덜 깼는지 마냥 늘어지고 싶다. 돌바닥에 색칠을 할 뭔 이유가 있으니 했겠지.

 

#바로크와 로코코 식이 뒤섞였다는 성당은 삼각주 안 미로 같은 드라이 플리쉐에크 골목 귀퉁이에 있었다. 예수회 소속 성 미카엘 교회. 그 아낙의 권유가 아니라면 또 느릿한 여행자가 아니라면 굳이 찾아갈 일이 없는 교회다. 뭐가 어떻게 섞인 건축 양식인지 밖에서 보기에는 알 수 없다. 나지막한 바깥 쇠문이 잠겨 있었다. 


안에 누가 있나 몇 번 흔들어도 인기척이 없어 돌아서는 순간 앞 골목에서 반팔의 흰색 폴로셔츠를 입은 청년이 활짝 웃으며 다가오더니 교회 보러 왔냐고 묻는다. 그렇다며 교회직원이냐고 했더니 웃으며 열쇠 꾸러미를 꺼내 문을 열고는 따라 오라고 손짓을 한다. 성큼성큼 교회로 들어간 청년은 제대(祭臺) 쪽으로 가려는 나를 옆방으로 이끌었다. 제법 넓었다. 자기는 보스니아 사라예보 출신 미르코슬라브라는 이름의 신부라고 소개 했다. 


서른을 갓 넘었을까? 내게 교회를 방문한 기념으로 보물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어눌한 영어였다. 너스레를 떨던 허름한 차림의 그가 신부라니, 또 무슨 보물을 보여 준다니, 깃털처럼 가볍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묵직하고 엄숙하게 바뀌는 듯 했다. 벽에 붙어 있는 열 개는 넘는 얕은 서랍이 양쪽으로 달린 마호가니 장 앞으로 간 그는 다이아몬드 보다 더 귀한 보석이 이 서랍들 가운데 한 곳에 들어 있으니 찾아보라고 했다. 


뭔 보석! 호기심이 일어 뽑기 하듯이 위에서 왼쪽 둘째 서랍을 골랐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다시 기회를 주었고 두어 번 더 고르자 모두 틀렸다며 오른 쪽 맨 윗 서랍을 열었다. 나는 잔뜩 기대에 차 그 안을 드려다 보았다. 그 안에는 보석은 커녕 휑 비어 있었고 뒤 쪽에 무언지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앞으로 끌어냈다. “아!”, 이런, 말라 비틀어진 새 몇 마리의 주검이었다. 


눈자위가 희고 어두운 회색을 띤 몸체가 제법 큰 것이 찌르레기 종류로 보였다. 멍하니 쳐다보는 내게 “죽은 새는 오늘의 우리 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웬 뜬금 없는 소리인가? 무슨 선문답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빤히 보기만 했다. 할 말이 없었다.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 성당,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성당, 믿음이 사위어가는 교회의 오늘을 상징하는 의미라는 것을 그의 표정과 눈치로 알아차리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걸 왜 반어법으로 보석이라고 했는지 조금 전까지 유쾌하게 떠들던 그의 얼굴은 금새 진지해졌다. 유럽의 성당이야 관광객들의 차지가 된 지 오래.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리라 짐작 되는 햇내기 사제의 갈색 눈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죽은 새는 기표(記表)와 기의(記意)를 모두 담고 있는 그의 종교의 오늘을 상징하는 기호(記號)라는 메시지로 알아들었다. 


그 의미가 그가 속한 교회에만 그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처음 보는, 스쳐가는 나그네에게 왜 그런 산중문답스러운 퍼포먼스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동네 사람 말고는 찾는 이 없어, 늘 썰렁하기만 하던 교회 앞에서 어슬렁대던 웬 동양인이 그에게는 가물 끝에 난 콩 씨 같았나? 나이 든 이방인이 고해 같은 넉두리라도 받아줄 품이 있다고 보여 사제의 냉철함이 잠시 무너졌는지. 로만 칼라 대신 셔츠 차림의 그가 감성적 청년으로만 보였다.


보스니아어나 크로아티아어도 지원되는 “구글” 번역기나 “파파고“가 핸드폰에 깔려 있지만 그걸 꺼내 들고 왜 이 나라로 왔는지부터 죽은 새의 기호를 푸는 깊은 교감을 나누기는 어림없었다. 깊숙한 곳에 있을 그의 “허탈”을 꺼내 대화를 이어 가려면 유장(悠長)한 교감이 필요했지만 AI의 언어로는 한창 못 미치지 않나. 눈만 마주친 채 대화 같은 침묵이 또 이어졌다.


서품을 받았을 순간 삼위일체를 향해 일렁이던 설렘이 무슨 곡절에서 벽에 부딪쳐 쪼그라들었나. 내 가슴은 멋대로 출렁였지만 그러나 그는 쾌활했다. 일부러 부리는 만용 같지 않은 당당함이 조금 전의 우울하게 보였던 갈색 눈빛에서 우러나왔다. 나는 새의 주검을 사진 찍고 싶은 충동도 잠깐 일었지만 안 찍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뒤에 그의 속내를 알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이메일 주소도 받았지만 이내 접자고 생각했다. 


그의 교회의 현실에 대한 담론을 주고받을 깜냥도 안 되면서 말을 나눌 맘이 일지 않았다. 때론 눈빛으로 나누는 교감이 더 깊지. 잠시 그와 나눈, 나로서는 응원과 격려를 담았다고 생각되는 눈만의 대화로 내 할 일은 다 했으리라며 더 일지도 모를 내 호기심을 추스렸다. 이 “아름다운” 파사우의 “아름다운”골목 속에 번져있는, 아니 어느 곳에라도 있을 옹이 같은 서글픔이나 남루한 세사(世事)의 한 부스러기려니 마무리 했다. 


여섯 나라, 다섯 민족, 세 개의 종교와 네 개의 언어를 갖고 살육하고 쪼개지고 하나가 되었다 또 갈라진,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그만큼 처절한 비극을 안은 발칸반도. 그 한 구석에서 피어났던 한 청년의 담대한 결심이 웬 바람결에 한 숨 꺾였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이 쓸데없는 오지랖이기를 바랬다. 그의 설렘의 순명서원(順命誓願)이 새 살로 새록새록 다시 돋아나기를 바라며 성호(聖號)를 긋는 것도 파사우가 그리워질 한 자락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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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4-03-07 17:3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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