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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의 세계인문기행(3)- "코카콜라와 CNN의 고장 아틀란타" - - 2차대전 군수품으로 성공한 코카콜라 -
  • 기사등록 2023-08-05 18: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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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 한국자원봉사신문 기획총괄위원장

 - 전 동아일보 기자

 - 저서 '<천일의 수도, 부산>  








코카콜라와 CNN의 고장 아틀란타


2차 대전 당시 군수품으로 성공







틀란타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뉴스 전문채널 CNN이 있다. 트럼프가 “CNN은 가장 부정확한 가짜 뉴스이므로 소설상을 줘야 한다”면서 백악관 공개 행사장에 CNN의 참석을 불허한 것은 CNN의 막강한 영향력을 알기 때문이다. 


 1991년 걸프전 때 모든 외교관과 언론사가 바그다드에서 철수하는데 CNN의 전설적 종군기자 피터 아넷이 현장을 지키면서 폭탄투하 장면을 생중계함으로써 방송의 위력을 세계에 과시했다. 울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은 ‘CNN은 유엔의 6번째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라면서 “영향력 있는 언론사 특파원은 대사관과 맞먹는 역할을 한다”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뉴스의 대명사가 된 CNN 본사에는 45분 정도의 투어 코스가 있으며 실제로 앵커가 되어 스크린 시연도 할 수 있다. 24시간 쉴 새 없이 세계 뉴스를 공급하는 CNN은 뉴욕과 LA, 워싱턴 DC에도 스튜디오가 있지만 전체 프로그램의 40% 이상을 아틀란타에서 송출한다.


 아틀란타에 있는 대표 기업은 역시 코카콜라이다. 요즘은 '아마존'이나 '애플' 등 IT기업이 선두 그룹으로 부상했지만 2천 년 대 초만 해도 브랜드 가치 1위는 언제나 코카콜라가 차지했다. 세계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음료는 코카콜라였기에 1969년 달에 착륙했다가 돌아온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의 환영장에 ‘코카콜라의 고장인 지구 귀환 환영’이라는 플래카드를 걸기도 했다. 


코카콜라가 하루 10억 개나 팔린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10억 시간 전에 인류가 출현, 10억 분 전에 기독교 등장, 10억 초 전에 비틀즈 공연, 10억 개 코카콜라 이전은 어제’라는 광고도 만들었다.


 카콜라 본사에 들어가면 입구 정원에 창업자인 존 펨프톤의 동상이 서 있다. 약사였던 그는 남북전쟁 때 남군의 기병대로 참전했다. 패전의 충격과 힘겨운 재건사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쓰러지자 그는 자양 강장제, 두통약, 소화제 기능의 코카콜라 시럽을 개발하여 손님에게 한 컵 씩 부어서 팔았다. 

1915년에는 ‘어둠 속에서 만져 만 봐도 알 수 있는 코카콜라 병 디자인 공모’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사람 몸매의 콘투어(Contour) 콜라병이 탄생되었다.


 아틀란타를 중심으로 남부지방의 음료에 불과했던 코카콜라가 글로벌 음료로 확산된 것은 2차 세계대전 덕분이다. 남부 출신인 조지 마셜 참모총장의 요청으로 2차대전 중 군부대와 함께 옮겨 다니면서 생산 공급하는 이동공장을 64곳에 설치하여 원가에 불과한 병당 5센트에 50억 병이나 공급했다. 


               2차대전 당시 코카콜라는 탄약과 같은 군수물자

 

당시 코카콜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총이나 탄약처럼 군수물자였던 것이다.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코카콜라에 중독되다시피 하여 고향에 돌아갔으니 이처럼 성공한 홍보가 어디 있으랴. 특히 미국 자본주의 상징인 맥도날드와 짝을 이룸으로써 급속도로 동반 성장했다. 코카콜라가 진출하지 않은 세계 유일한 나라는 아마 북한이 아닌가 한다. 


 코카콜라는 설탕물에 코카잎, 콜라열매, 카페인, 캬라멜 등 14가지 성분이 들어가고 거기에 15번째 첨가물이 있는데, 이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 제조기법은 아틀란타가 본사인 선 트러스트 은행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등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홍보전략을 쓰고 있다. 


업자 펨프톤은 “25,000달러가 있다면 24,000달러는 광고비로 쓰고 1,000달러로 코카콜라를 만들겠다”고 밝혔듯이 첫해는 매출액보다 많은 광고비를 썼다. 

성탄절이 되면 풍성하고 인자한 몸매에 빨간 옷과 하얀 수염 휘날리며 콜라병을 든 채 눈썰매를 몰고 가는 산타클로즈 할아버지를 코카콜라가 창안함으로써 여름에만 마시던 청량음료를 4계절 음료로 바꾼 것은 전설적인 마케팅 전략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예수가 태어난 곳은 사막지역이므로 낙타가 어울리며 산타클로스의 모델인 희랍정교회 성 니클라우스 주교는 앙상하게 메마른 몸매였다. 


 아틀란타에는 높이 500m, 둘레가 8km나 되는 세계 최대 화강암 공원인 스톤 마운틴(Stone Mountain)이 있다. 서부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에도 거대한 바위산들이 있지만 단일 바위로는 길이가 4마일이나 되는 스톤 마운틴을 당할 수가 없다. 요즘은 20분 간 바위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갖가지 볼거리를 연출하는 관광열차도 있다. 


          스톤 마운틴은 길이가 4마일이나 되는 세계 최대 화강암 공원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케이블 카를 타기 위해 연결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숲 길도 무척 아름답다. 5분 정도 케이블 카를 타고 너럭바위에 오르면 아틀란타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바위 틈새마다 나무들이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며 군데군데 자라는 것을 보니 생명의 경외감마저 느껴진다. 


이 바위에는 남부의 3대 영웅, 즉 남부연맹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슨, 전투마다 눈부신 활약을 보여 돌담벽(Stonewall)으로 통하던 토마스 잭슨 장군, 뉴욕의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지만 고향 버지니아가 연방에서 탈퇴하자 군복 벗고 남부로 내려와 총사령관이 된 로버트 리 장군의 기마상이 새겨져 있다. 


가로 58m, 세로 27m로 무려 45년 간 부조한 세계 최대 큰 바위 얼굴이다. 그런데 최근 흑인  인권단체는 “노예제 존치를 주장하며 북군과 싸운 사람들을 영웅시할 수 없다”면서 조각상 철거를 주장하고 있다. 


 장기간 미국여행을 하면서 아틀란타를 베이스 캠프로 삼은 것은 인근 웨스트 포인트의 기아 자동차와 관련된 부품 공장을 운영하는 친구의 딸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댁은 우리들의 모든 여행 일정 조정과 편의 제공은 물론, 수시로 푸짐한 한국음식을 마련하여 향수를 달래주곤 했다. 


         남부 사람들의 특별한 친절함, 즉 "서던 호스피 텔러티"


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도 나오는 남부사람들의 특별한 친절함, 즉 서던 호스피탤리티(Southern Hospitality)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남부사람들은 먼 곳에 사는 친척을 방문할 경우 하루 이틀 일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휴가로 모일 경우 이듬해 여름까지 머무르는 것이 보통이고, 신혼부부의 경우 인사차 들른 집이 마음에 들면 둘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기도 한다. 일요일 만찬에 온 할머니가 그 집에 몇 년 더 눌러 살다가 아예 장례까지 치르는 예는 흔히 있는 이야기다.


 이곳 주민들의 발음대로 ‘애를래나’는 원래 체로키 부족의 거주지였다. 체로키족은 북미 최초의 원주민이자 유일하게 고유문자를 갖고 있는 문명화된 민족이다. 1820년대 이 근처에 금광이 발굴되자 백인들이 골드러시로 몰려들면서 이들을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시켰다. 체르키족은 이주에 반대하여 전쟁까지 벌였으나 결국 머나먼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을 떠나면서 8천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르키족의 혈통을 받은 유명인은 엘비스 프레슬리, 지미 헨드릭스 등 음악인과 케빈 코스터너, 버트 레이놀즈 같은 배우들이 있다. 

 

 아틀란타에서 3시간 남짓 북녘으로 가면 기네스북에 올라 있는 세계 최대 저택 빌트모아(Biltmore House & Gardens)가 있다. 19세기 미국 최고 갑부이자 ‘철도왕’이었던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의 손자 조지 워싱턴 밴더빌트 3세가 6년 간 세계 유명 건축기술자 1천여명을 초빙하여 노스캐롤로이나 애슈빌에 세운 르네상스식 대저택이다. 


            세계최대 저택 빌트모아, 252개의 방과 65개의 벽난로, 45개의 화장실


1895년 성탄절 이브에 개관한 이 저택 건축을 위해 건축자재 운반용 철도까지 부설했으며 저택부지 양쪽으로 프렌치 브로드 강과 스완나노아 강이 흐를 정도로 넓고 안전한 지역이어서 2차 대전 때는 워싱턴의 국립 아트 갤러리에 있던 미술품을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기도 했다. 


 주택단지가 여의도 면적의 4배인 125.000에이커이고 입구 매표소에서 저택까지 5km나 되어 셔틀버스로 5분 걸리며 입장료를 89달러나 받는다. 집의 건평만 4에이커이며 지하 1층 지상 3층이지만 일반 주택의 7층 높이다. 


이 252개, 벽난로 65개, 화장실이 45개이며 와이너리, 수목원, 수영장, 볼링장 등 각종 시설이 많아 궁정보다 더 화려하며 집안 관리인이 450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밴더빌트 가문과 인척 관계인 재클린 여사가 케네디와 결혼할 때 착용한 면사포는 밴더빌트 3세의 외동딸 코넬리아가 세실과 결혼할 때 사용했던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도서관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서재에는 가죽으로 장정된 하드 카버의 세계 유명 책들이 1만 권 이상 가지런히 꽂혀 있다. ‘밴더빌트 리저브’라는 유명 와인도 이 집안 와이너리에서 생산한 것이다. 


 1920년대 미국은 산업발전으로 풍요의 시대를 맞이했다. 20년대 초 68이었던 주식시장의 다우지수가 20년대 말에는 380으로 껑충 뛴 이른바 ‘으르렁거리는 20년대(The Roaring 20's)’였다. 금주령 시대인데도 재즈와 비밀술집(Speakeasy)이 흥청거리면서 자유분방한 패션으로 남녀평등을 주장한 신여성들, 즉 프랩퍼(Flapper)가 등장하던 시기다. 


우리 학창시절 건달 여학생을 ‘후라빠’라고 한 것은 여기서 나온 말이다. 철도왕 밴더빌트는 당시 뉴욕의 왕궁이라던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석유재벌 록펠러, 보석상 티파니, 켄터키 버번 위스키의 제임스 페퍼, 후에 대통령이 된 루즈벨트 등의 명사들과 어울렸다


           문화적 빈곤 절감한 미국이 유럽 귀족의 삶을 모방


 소비문화의 서사시인으로 알려진 피츠 제랄드의 <위대한 유산>은 어메리칸 드림을 이룬 미국 호황기의 세태를 묘사한 소설이다. 물질적 풍요는 유럽을 앞섰지만 정신적 문화적 빈곤을 절감한 미국은 유럽 귀족들의 삶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카네기가 클래식 음악의 신전인 카네기 홀을 세웠는가 하면, 밴더빌트는 프랑스 와인 단지인 르와르 강변의 블루아성을 모방하여 빌트모아 저택을 지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 이름을 빌리고 밴더빌터에 3세를 붙인 것도 유럽귀족을 흉내낸 것이다. 


 밴더빌트 3세가 전원생활을 바라는 어머니를 위해 건설한 저택이었지만 관리유지가 어려워지자 주정부에 위탁관리를 맡기고 단지 내 토지도 여러 곳에 분할 기부했다. ‘남부의 아이비리그’라고 하는 테네시 내슈빌의 명문 밴더빌터 대학도 코르넬리우스가 100만 달러를 기부해서 설립한 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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