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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의 세계인문기행(4)-셔먼장군, 마가렛 미첼, 마틴 루터 킹의 고향
  • 기사등록 2023-08-21 15:5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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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

 - 한국자원봉사신문 기획총괄위원장

 - 전 동아일보 기사

 - 저서<천일의 수도, 부산>







근 수년 간 한 달 정도 일정으로 미국을 세 번이나 방문하면서 그때마다 조지아 주도 아틀란타를 키 스테이션으로 잡은 것은 절친한 고등학교 친구가 기아자동차에 부품을 공급하는 플라스틱 컴파운드 공장을 그곳에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면적이 넓은 조지아 주는 1732년 영국왕 조지2세 때 식민지로 편입되면서 왕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조지아 주는 영국의 식민지 13개 주 중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합류했지만 1861년 초 제일 먼저 연방에서 탈퇴하여 남부연합 결성을 주도했고 남북전쟁에 패한 뒤에는 1870년 7월 가장 늦게 연방에 다시 복귀했다. 


초대 주지사인 제임스 오글소프 장군은 철저한 도덕주의자로서 신대륙 식민지에 천국과 같은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영국의 빈민과 빚으로 감옥살이 하는 수감자들을 신대륙으로 이주시킨 박애주의자였기에 사바나를 비롯한 미국 곳곳에 오글소프의 동상과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아틀란타는 농작물이나 목화밭이 워낙 유명하여 초기에는 주민의 30% 이상이 노예였으며, 방앗간이나 방적공장을 뜻하는 '밀스'(Mills)라는 지명을 요즘도 거리 곳곳에서 자주 만난다.

조지아 주 출범 때 주도는 유럽과 마주 보고 있는 대서양 왕래 항구 사바나였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 톰 행커스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의 촬영지가 바로 사바나이다. 


두 번째 주도는 매년 4월 초 마스터스 골프대회가 열리는 오거스타, 세 번째는 목화밭으로 유명한 루이스 빌, 네 번째는 조지아 군사대학과 간호대학이 있는 밀리지 빌이며, 마지막으로 1868년 현재의 아틀란타로 이전했다. 


 1836년 원주민 체로키로부터 허허벌판인 토지를 양도 받은 후 철도를 부설하면서 이곳은 남쪽 끝의 종점이므로 ‘터미너스’로 불리다가 1853년에 아틀란타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아틀란타 지명은 대서양을 뜻하는 아틀란틱 오션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바나까지 자동차로 5시간 거리여서 대서양과 직접 연관은 없다. 


    '대서양'의 어원은 전설속의 이상향인 그리스의 '아틀란티스'


테네시 주의 차타누가에서 아틀란타까지 운행하던 철도회사 '웨스턴 앤드 아틀란틱 레일로드'가 남부의 종착역 이름을 '아틀란타 퍼시피카'로 정한데서 생긴 지명이다.  대서양의 어원은 전설 속의 이상향인 그리스의 '아틀란티스'에서 나온 것이다. 강력한 해군력으로 아테네를 제외한 모든 도시국가를 정복한 아틀란티스의 오만함에 화가 난 제우스가 도시 전체를 물 속에 가라앉혀버린 것이다. 


그리스 크레타 섬과 산토리니 사이의 어딘가에 이상향 아틀란티스가 잠겨있다는 전설이 있다. 유토피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미국에는 '아틀란타'라는 크고 작은 도시 이름이 21개나 된다. 아틀란타에는 남북전쟁의 운명을 가늠했던 케네소 산 전투장을 국립 전투장 유적지로 보존하고 있다. 


1864년 6월 19일부터 2주간 윌리엄 셔먼 장군의 북군 10만명과 조셉 존스턴의 남군 5만명의 케네소 산 대결은 남북전쟁 중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투였다. 무더위 속에 5300여구의 두 진영 전사자 악취를 견딜 수가 없어서 잠시 휴전을 하면서 시체를 골짜기에 묻어야 했다. 케네소는 체로키족 말로 ‘무덤’이라는 뜻이다.


전선에 진척이 없자 제퍼슨 데이비스 남부연합 대통령은 존스턴 장군을 해임하고 대신 후드 장군을 보냈으나 얼마 후 남군이 후퇴함으로써 북군의 승리로 굳혀지기 시작했다. 적진에 와서 승리를 거둔 셔먼 장군은 아틀란타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모두 외곽으로 내쫓고 도시 전체를 불태워 폐허로 만드는 과정에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남북전쟁 때 미국 인구의 2%인 70만명의 장병이 사망했으며 민간인 희생자도 5만명이 넘는다. 셔먼 장군의 동상 옆에는 “전쟁은 잔혹하다. 잔혹할수록 전쟁도 빨리 끝난다”는 그의 전쟁관이 새겨져 있다. 


 뉴욕타임스 상징 언론인 제임스 레스턴은 월남전에서 마을을 초토화시켰던 악명높은 고엽제 사용을 두고 “그 씨를 윌리엄 셔먼이 뿌렸다”고 말한 바 있다. 아틀란타는 패전한 곳이라서인지 전쟁기념관은 조촐한 편이며 기념관 옆에는 일리노이 주와 인디아나 주 출신 북군 희생자 480여 명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서 있다.


 어쨌든 북군을 승리로 이끈 셔먼은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하고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종전 2년 뒤인 1866년 그의 이름을 붙인 미국 함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대동강에 나타났다. 셔먼호 선원들은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 관리들을 납치하고 민간인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와 평양시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를 빌미로 미국이 1871년 대규모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초토화시킨 사건이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미군의 대규모 포탄에 활과 창으로 맞선 조선은 3일간 일방적인 공격을 받았기에 ‘조미전쟁’은 미국전쟁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전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틀란타는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의 운명을 쥐고 있던 군수물자의 보급기지였다. 남군의 생명선인 아틀란타가 1864년 북군의 윌리암 셔먼 장군에 점령 당하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종전 6일만에 링컨 대통령이 남부 연합정부의 추종자였던 배우 존 윌커스 부스에 의해 암살 당했다. 


              제너럴 셔먼호와 신미양요(辛未洋擾)


링컨의 서거에 따른 충격과 슬픔을 전달할 TV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이라 링컨의 관을 실은 장의 열차가 전국을 순회하면서 애도의 마음을 연결했다. 당시는 여러 민간 회사들이 철도를 운영한데다 표준시가 도입되기 전이라 워싱턴이 정오이면 뉴욕은 12시 12분, 시카고는 11시 17분이었다. 


국제표준의 단일 시간제가 도입된 것은 20년 후인 1884년이므로, 당시에는 도시마다 시간이 달라 열차 스케줄을 짜고 시민을 모아 추도행사를 하는 것이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링컨 특별열차’는 13일 동안 2000여 km를 달리며 수많은 조문객을 만났다.


 아틀란타는 미국 남동부의 경제, 문화, 산업, 교통의 중심지이다. 이곳은 원래 체로키족과 크리크족이 살던 곳으로 독립전쟁 때는 이들 원주민들이 영국군을 도왔다. 조지아주가 비옥하고 광활한 농토에다 금광이 발굴되자 서부 개척자의 아이콘이자 민주당의 초석을 놓은 미국 7대 대통령인 앤드류 잭슨은 1830년 ‘인디안 제거법(Indian Removal Act)’을 제정하여 원주민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체로키족 1만4천여명이 수만 킬로를 걷는 도중 대부분 사망하고 겨우 1,200명 정도만 황무지 오클라호마에 도착했다. 이들이 미시시피 서부로 내쫓기면서 부른 노래가 그 유명한 찬송가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Amazing Grace)'이며 미국 의회는 1996년 이 길을 ‘눈물의 길(Trail of Tears)'로 명명했다. 


1620년 영국에서 건너온 최초의 청교도 이민자 102명이 플리머스항에 도착하여 신대륙에 적응하지 못하고 떼 죽음을 당하자 이들 ‘건국 아버지(필그림 파더스)’을 구해 준 마사소아트 추장의 동상을 건립해 준 박애정신은 황금 앞에 박해정신으로 표변한 것이다.


 조지아주를 ‘복숭아 주(Peach State)'라고 하지만 실제로 복숭아가 유명한 것은 아니다. 체르키족이 강제퇴거 당하지 않기 위해 소나무의 일종인 피치(Pitch)나무 요새에서 격렬히 저항했기에 발음이 비슷한 복숭아로 되었다고 한다. 아틀란타는 원래 농산물지역이었으나 제2차세계대전 기간 중 인근 마리에타에 대규모 전투기공장이 들어서면서 산업도시로 변모했고, 1996년 미국에서 세 번째 하계 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산뜻한 현대도시로 급속히 발전했다. 


 아틀란타에는 코카콜라, AT&T, 델타항공, CNN, UPS, NCR, 홈디포 등 12개의 대기업 본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뉴욕과 휴스톤에 이어 세 번 째 기업하기 좋은 도시가 된 것이다. 기아자동차의 아틀란타 공장과 마찬가지로 독일과 일본도 이곳에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LA의 흑인폭동 사건과 뉴욕의 9.11테러 이후 아틀란타로 이주한 한국교포들이 많아 한인촌이 두 군데나 있다.


 아틀란타 하츠필드 잭슨 공항은 이용객과 여객기 발착 회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허브공항이지만, 공항을 벗어나자마자 시내 중심가까지 숲 길로 이어져 있다. 도심의 주택마다 커다란 정원수를 안고 있으며 시내를 조금만 벗어나면 모든 집들이 숲의 성에 둘러 쌓여 있을 정도로 아틀란타는 숲의 도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박경리의 <토지>와도 비교될 만 


 미국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소설은 루이자 올컷의 <작은 아씨들>과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아틀란타를 배경으로 하여 이 도시의 브랜드가 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출간 반 년만에 100만부가 팔렸으며 오늘날도 미국 여성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다는 책이다.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도 1940년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석권할 정도로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품이었다.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하녀역의 해티 맥 대니얼은 시상식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아틀란타 시당국은 1939년 12월 15일 세인의 관심을 모았던 4시간 짜리 초대형 영화 시사회를 아틀란타로 유치했지만 영화에 출연한 흑인 배우들만은 끝내 입장시키지 않음으로써 제작진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한때 북한 외교관들이 미국에 오면 이 영화의 비디오를 선물로 사 갔다고 한다.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마가렛 미첼은 아버지가 역사학자인데다 외조부가 직접 대위로 남북전쟁에 참전했기에 전쟁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며 자신이 <아틀란타 저널> 기자로 재직하면서 보충취재를 해서 탄탄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소설을 썼던 것이다. 역사적 전환기를 배경으로 땅에 집착하는 강한 생명력의 여주인공이 등장한다는 면에서는 박경리의 <토지>와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틀란타 피츠트리 999번지에 있는 마가렛 미첼 생가는 좁고 검소했다. 조그만 주방과 침실, 그리고 비좁은 거실에는 책상 위의 타자기가 전부다. 2층에는 각종 사회활동 관련 사진과 각국의 영화 포스터가 진열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이 소설을 ‘바람에 나부낀다’는 뜻의 ‘표(飄)’ 한 자로 번역한 것이 특이하다.


 생가 건너편 홀에는 마침 이곳 출신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서거 50주기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마틴 루터 킹이 10세 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제작을 위해 침례교 성가대원으로 출연했던 인연이 여기서도 이어지는 것 같다. 킹 목사의 원래 이름은 <마이클 킹>이었으나 독일 여행 중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감명받아 그의 이름으로 개명한 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킹 목사의 생가는 그가 어릴 적 세례받고 성가대 활동을 하고 후에는 목사로서 설교도 한 에벤에셀 침례교회 바로 아래에 있고 묘소도 근처에 있다. 킹 목사의 영향으로 아틀란타에는 비폭력조정위원회와 남부기독교지도회의 본부가 있다. 아틀란타는 주민의 30%가 흑인이며 미국 최초로 흑인 시장이 선출된 곳이다. 공항 이름에 들어간 잭슨은 바로 초대 흑인 시장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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