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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동 현

 - 한국자원봉사신문 기획총괄위원장

 - 전 동아일보 기사

 - 저서<천일의 수도, 부산>






'아메리카' 라는 이름은 콜럼버스와는 달리, 신대륙이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맨 처음 주장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에스파냐 주재원이었으나 평소 탐험에 관심이 많아 콜럼버스를 파견한 벨라르디 상사로 자리를 옮겨 다섯 차례나 해외 개척길에 나섰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들은 미국 캐나다 등 신대륙의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면서 자국의 도시명에 'New'를 붙이는 게 관행이었다. 1625년 당시 해상제국 네덜란드가 인디안 원주민에게 50 달러 어치의 구슬과 악세사리를 주고 차지한 맨해탄 섬에 건설한 식민 도시가 '뉴암스텔담'이었다. 


맨하탄은 원주민의 말로 '마나하타', 즉 ‘구릉지’라는 뜻이다. 초기에 건너 온 동인도 회사의 화란인들은 장사가 목적이었기에 주로 '비버' 라는 동물의 가죽을 유럽에 팔았다. 뉴욕의 초창기 문장(紋章)에는 인디안과 화란인 사이 풍차 위 아래에 다람쥐 같은 비버 그림이 있다. 미국 최초의 단편 소설인 워싱턴 어빙의 ‘립 밴 윙클’도 뉴욕 배경의 화란인 공처가 이야기다.


 뉴 암스텔담으로 정착한지 40년 후 요크공이 이끄는 영국군이 네덜란드를 밀어내고 새로운 주인이 됨으로써 'New York'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영국을 점령한 바이킹족 언어로 요크는 마굿간(요비크)이라는 뜻이다. 뉴잉글란드, 뉴햄프셔, 뉴올리언스 등이 모두 이렇게 탄생된 이름이다. 영국으로부터 독립 당시 뉴욕은 미국의 수도였으며 조지 워싱턴도 맨해탄 남단에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 후 수도는 필라델피아를 거쳐 워싱턴D.C로 옮겼다.


 초기 뉴욕의 도시계획을 설계한 존 랜들은 자신의 집이 헐려 나가는 것은 물론, 재산 손실을 입은 지주들의 생명 위협도 감내하면서 바둑판 같은 격자 도로를 강행했다. 오늘날 해마다 뉴욕을 찾아오는 6천만 관광객들이 지도 한 장만 들고 우리 마을처럼 편리하게 다닐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 것은 존 랜들 덕분이다. 


 ‘세계의 수도’ 뉴욕의 관문인 뉴저지의 뉴욕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다양한 먹거리가 있는 16번가 첼시 시장으로 향했다. 첼시가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인 것은 클린턴 대통령의 딸이 첼시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시 이름의 원산지는 물론 영국이겠지만, 130여년 전통의 첼시호텔이 근처 23번가에 있기에 첼시타운이 생긴 것이다. 빅토리안 고딕방식의 12층 붉은 벽돌로 된 이 건물은 1883년 건설 당시만 해도 뉴욕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으나 분양이 잘 되지 않아 1905년부터 호텔로 변신했다. 마침 극장과 공연장이 주변에 산재해 있었기에 연예인들이 이 호텔에 장기 투숙했으며, 차츰 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톰 소여의 모험>의 마크 트웨인, <마지막 잎새>의 오 헨리가 단골이었고, 30년 이상 투숙하다가 이곳서 별세한 화가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 장기 투숙한 가수 레너드 코헨은 노래 ‘첼시 호텔’을, 본 조비는 ‘미드나이트 첼시’를 작곡했으며 천재 기타 리스트 지미 헨드릭스나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수 밥 딜런도 한때 첼시호텔 거주민이었다. 


팝 아트의 선두 앤디 워홀은 1960년대 중반에 <첼시 걸스>라는 다큐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호텔에 머물던 가수 조니 미첼의 ‘첼시 모닝’이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했던 클린턴 대통령이 딸 이름을 첼시라고 붙였다고 한다.


 이곳 첼시 마켓은 원래 과자공장이었다. 19세기 말 미국 최대 과자회사인 시카고의 아메리칸 비스켓에 맞서기 위해 뉴욕의 8개 군소 제과회사가 연합, 콘소시엄을 만들어 내셔널비스켓, 즉 나비스코를 설립했다. 20세기 초만 해도 철광업계의 카네기, 정유업계 록펠러, 제과업계 나비스코로 명성을 유지했다. 


 1910년대 포드 자동차의 대량생산 시스템이 모든 산업에 확산되면서 과자공장도 수직의 개별 오븐이 아니라 수평의 컨베어 벨트로 제조공정이 바뀜으로써 나비스코 공장은 광활한 뉴저지로 이전했다. 이곳은 한동안 폐허가 되었다가 20여년 전 푸드코트로 부활한 것이다. 지금도 점포 내부에는 헐어낸 벽돌과 과자공장의 기계설비가 투명한 유리바닥 아래에 장식되어 있다.


 상 나비스코 빌딩 안으로 들어서니 시원한 냉방시설이 반갑기는 했지만 추석이나 설날 서울역 대합실처럼 인산인해를 이룬다. 싱싱한 해산물이 유명하다고 해서 가장 길게 줄을 선 랍스타 가게 앞에서 30분간 기다렸다가 46불을 지불하고 랍스타 한 마리와 추가로 튼실한 다리 하나를 받아들었지만 앉아서 먹을 장소가 없다.


선술집처럼 생긴 기다란 탁자로 가서 먼저 차지하고 있는 중국 관광객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옆에서 기다려야 했다. 명색이 5만원 짜리 요리인데 이런 식으로 대접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 맛이 일품이라 서운한 마음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과거 나비스코의 명성을 유지하려는 듯이 에이미스, 사라베스와 같은 빵과 커피점들이 뉴욕의 새로운 명물 브랜드로 떠오르고 있다. 유명하다는 가게 앞에 가기만 하면 한국사람들이 몰려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가 정보사회의 기수가 될 소질이 분명 있어 보인다. 


 첼시의 또 다른 명물은 맥키트릭 호텔이다. 호텔 간판만 걸려 있지 5층 창고 건물에 불과한 이곳에서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라는 괴상한 연극이 10년 이상 공연되고 있다. 세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줄거리를 가져온 이 연극은 배우들이 각각 흩어져서 개인 연기를 하고 관객들도 배우들을 따라다니며 관람한다. 


객은 핸드폰을 비롯한 모든 소지품을 맡겨야 하고, 잔인하고 음산하고 야한 장면이 있기에 모든 마스크를 써야 한다. 3시간 남짓한 공연 내내 서 있거나 어두운 층계를 뛰어다니다 보면 지칠 뿐만 아니라 동행한 일행을 놓치기 일쑤다. 


 첼시마켓 바깥으로 나오면 한때 대서양을 오가는 호화 여객선을 위한 항만시설, 즉 옛 부두가 보인다. 1912년 4월 12일 2,200 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싣고 영국 사우스 햄프턴을 출발한 타이타닉호의 도착 예정항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나 예정일보다 4일 지나서 675명의 승객만 구조선에 실려왔을 때 이곳은 세월호의 팽목항 처럼 눈물바다였다. 


 첼시마켓에서 3블럭만 내려가면 갱스버트 스트리트가 나온다. 갱스버트는 미국 독립전쟁 영웅이었는데, 대령으로 전역한 후에 제재소와 제분소를 운영했던 곳이기에 그의 이름이 남아있다. 그런데 갱스버트 외손자가 바로 <백경>의 작가 허만 멜빌이며 그가 바로 태어난 곳에 스타벅스 커피점이 들어있다. 스타벅스는 소설 <백경>에 나오는 1등 항해사 이름이므로 이런 인연이 어디에 또 있을까?


 뉴욕의 거리가 차츰 번화해지면서 마차와 보행자, 자동차 등이 뒤엉켜 극심한 교통체증이 일어날 뿐만 아니라 거리 곳곳에 말의 분뇨가 방치되어 전염병까지 번지자 첼시시장 쪽으로 밀가루와 정육 등 각종 원자재와 제품을 수송하기 위해 고가 철도인 하이라인(High Line)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20여년 후 대부분 공장이 교외로 이전하고 트럭이 화물운송을 대신하여 철도가 쓸모없게 되자 녹슨 철길에 잡초만 무성하게 되었다. 철길 아래 헐값으로 땅을 산 지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재개발을 주장했으나 환경론자들의 보존 목소리에 묻혀 애물단지 철길이 도심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길이가 1마일 쯤 되는 하이라인 공원은 골프용구를 연상시키는 ‘IronWoodLand’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이고, 군데군데 조각작품과 벤치를 마련했다. 우리의 서울역 고가공원(서울로7017)은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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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0-04 16: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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