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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기획총괄위원장, 전 동아일보기자


 





   하탄 남단은 <월 스트리트>로 불리는 금융가이다. 초기 네델란드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인디언과 영국군의 습격을 막기 위해 높이 4m 정도의 말뚝으로 벽을 세운 데서 ‘월가’라는 이름이 나왔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농업국을 지향했을 때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금융자본을 주창, 미국 자본주의 기틀을 쌓았기에 오늘도 10달러 지폐의 주인공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고집이 너무 강해 부통령 에렌 버와 권총 결투를 벌여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무덤은 월 스트리트의 출발선인 트리니티 교회에 있다. 


 해밀턴과 함께 뉴욕 금융시장의 초석이 된 사람은 J. P. 모건. 월가를 지배한 은행가인데다가 흡수합병의 귀재인 모건은 타이타닉 출발 직전에 승선을 취소함으로써 목숨을 건졌지만, 1913년 생일기념으로 로마 여행 중 사망했다. 그의 부음을 접한 월스트리트는 조기를 내걸었고, 장례식 때는 2시간 동안 주식 거래를 중지하기도 했다. 


    월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 알렉산더 해밀턴과 J. P. 모건


20대 후반인 모건은 남북전쟁 때 카빈 소총을 북군으로부터 3.5달러에 무더기로 샀다가 22달러에 되팔아 2천억원을 벌어서 금융서비스 분야의 스타가 되었다. 한때 42개 회사를 소유했던 모건의 생가는 뉴욕증권거래소 바로 옆에 있으며 뉴욕 모건도서관에는 구텐베르그의 최초 인쇄물인 면죄부와 42행 성서를 비롯한 희귀본 서적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40여년 전만 해도 외국 귀빈이나 유명인사의 환영 퍼레이드는 주로 이 월스트리트에서 벌였다. 증권시세 표시기에 끼우는 두루마리 종이인 ticker tape를 색종이와 섞어 잘라서 고층빌딩에서 무더기로 뿌리는 것이 환영이었다. 

거리 축제의 인기도는 다음날 환경미화원들이 수거한 폐지 무게로 측정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2차대전 종전 때인 1945년 8월 15일이 5438톤으로 1위이고, 1969년 암스트롱이 달나라 착륙 후 귀환 때 3474톤으로 2위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전산시스템 등장으로 종이가 없어지고 고층건물 창문을 열 수 없게 되자 자연히 이런 풍속도 사라져버렸다. 1929년 부활절을 맞아 뉴욕의 젊은 여성 30명이 여성권리운동의 상징으로 담배를 피우며 활보하던 곳도 이 거리다. 


 ‘광란의 20년대’인 1927년 맨하탄에 여성전용인 바비즌호텔이 들어섰다. 1920년 미국여성이 참정권을 얻게 되면서 더 이상 딸, 아내, 어머니로 머물고 싶지 않은 신여성들이 가정 바깥의 공간을 원했기에 이곳은 젊은 여성들의 신전이 되었다.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사고 때 생존자 수색을 위해 구명보트를 양보하고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몰리 브라운이 첫 장기 입주자이며 배우 그레이스 켈리, 리타 헤이워스와 작가 실비아 플라스, 디자이너 뱃시 존슨 등이 단골 투숙객이었다. 


남성들은 호텔 로비까지만 입장이 가능했는데, 일부 남성이 배관수리공이나 산부인과 의사로 위장하여 침입하려다 실패하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경영난으로 남성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기는 했지만 몇몇층은 여성전용을 고수하여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제대로 보려면 자유여신상을 돌아오는 크루즈를 타고 일단 바다로 나가는 게 좋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 때만 해도 1시간을 기다려 겨우 유람선에 오르자 내부는 온통 중국세상이었다. 한국에서는 하루 7편 정도의 비행기가 미국으로 오는데 비해 중국은 하루 55편에 연간 100만 이상의 관광객들이 뉴욕에 몰려오니, 각종 안내 설명에는 중국어가 상좌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세계 금융, 통상,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은 미국의 모든 명암을 모두 갖고 있다. 최첨단 도시답게 가구 중위 소득은 높은 편이지만, 소득 불평등도 최고로서 인구 840만명 중 8만여명이 노숙자이다. 전체 시민의 절반은 집에서 영어를 쓰지 않고 있으며 인구의 37%가 외국서 태어난 이민자이다. 


뉴욕 인구의 10%가 의료보험이 없으며 지난 코로나19로 인한 미국 사망자의 20% 이상이 뉴욕커였다. 영화 ‘배트맨’과 ‘조커’의 배경인 가상의 범죄도시 고담(Gotham)은 바로 뉴욕이다. 과거 뉴욕에서 염소를 많이 키웠기에 goat`s town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담이 god damn이라는 새로운 해석도 있다.


 뉴욕에는 세계 170여개의 언어가 난무한다고 하는데, 크루즈 승선객의 각종 언어는 이내 중국어 속에 묻혀버린다. 그러나 선진강국이라고 해서 반드시 언어가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UN에서 사용하는 공식어에 독일어, 일어, 이태리어는 빠져 있다. 과거 전범국이라는 오명 때문이다. 반면에 유니세프의 6개 공식언어에 한국어가 당당이 들어있다.


 미국 관문인 뉴욕 입구에 우뚝 선 자유여신상의 오른손은 계몽의 빛을 밝히는 횃불을, 왼손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생명과 자유, 행복의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독립선언서를 들고 있다. 원래 구리색 동상이었으나 130여년 간 산화되어 이제는 새파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부의 철골구조는 에펠탑을 세운 에펠이 설계했다고 한다. 영국과 숙적 관계였던 프랑스가 물심양면으로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라파예트 후작이다. 그는 지원병으로 미국에 건너가 조지 워싱턴 휘하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전한 공로로 백악관에 조지 워싱턴 사진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미국 명예시민 1호인 라파예트를 지명으로 사용하는 도시가 미국에는 20여개나 되며, 거리 이름은 무수히 많다.


 자유여신상이 있는 리버티섬과 맨하탄 사이에는 엘리스섬이 있다. 그 섬 한 가운데는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성당과 닮은 붉은 색 벽돌건물이 푸른 숲 속에 돋보인다. 유람선 안내원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라고 설명한다. 이 아름다운 건물이 한때 이민관청이어서 과거 이민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메리칸 드림을 품고 조국과 친지를 멀리한 채 유럽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이민자 5천만명 가운데 3600만명이 미국행을 택했다. 증기선이 없던 초창기, 감자 입마름병으로 대기근을 맞은 아일랜드인들은 항해 도중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기에 바람과 돛에 의존했던 범선을 죽음의 배(coffin ship)라고 했다. 


 죽음과 공포를 무릅쓰고 머나 먼 항해와 멀미로 지쳐 있다가 마침내 저 멀리 자유여신상이 흐릿하게 보이면 모두들 바깥으로 나와서 “아메리카, 아메리카!”를 외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자유여신상은 이민자들의 상징이자 등대이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여신상 하단부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곤 했다. 요즘은 성차별 때문에 ‘자유의 상’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환호성도 잠시, 막상 엘리스 섬에 상륙하여 이민심사 대열에 서게 되면 가슴이 조여오기 시작한다. 혹시라도 거절당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1, 2등석 승객은 배 안에서 비교적 간단한 절차로 통과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3등석 승객은 5시간씩 철저한 검증을 거쳐야했던 것이다. 전염병환자나 범죄자는 별도로 구금되었다. 


초기에는 각 지역마다 이민자의 쿼터가 있어서 아무런 하자가 없어도 할당량이 차면 입국이 금지되어 되돌아가야 했다. 아시아는 상대적으로 이민자의 쿼터가 아주 작았으나 1965년부터 차별이 없어지자 우리나라도 미국행 이민물결이 넘첬다. 영화 ‘미나리’에서 보듯이 병아리 감별사 인기가 높자 1970년대 초에는 대도시마다 병아리 감별학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엘리사 건물을 통과해서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와 그 후손이 현재 미국민의 절반 이상이다. 그 대열에는 감자기근으로 아일랜드서 온 케네디 대통령의 증조부도 있었다. 지금은 이민박물관으로 변신하여 당시 이민자들의 각종 소지품과 애환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미국은 원래 부패한 가톨릭에 반기를 들고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유럽서 건너온 개신교도들이 세운 나라이므로 아일랜드나 이탈리아, 독일 등의 가톨릭 교도들이 뉴욕으로 대거 몰려오는 것에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민자들은 어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드넓은 신세계를 향해 몰려들지만 미개척지인 서부를 찾아갈 돈도 없고, 대부분 남자 홀로 와서 자리를 잡으면 나중에 가족을 불러들여야 했기에 뉴욕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도 잘 드러나 있듯이 1840년대 초반 뉴욕의 가장 빈민촌인 월스트리트 북녘의 5거리 ‘파이브 포인츠(Five Points)'에는 매일 수 천 명씩 몰려드는 아일랜드 이민자들로 들끓는 범죄의 소굴이었다. 당시 언론은 뉴욕의 빈민촌을 ‘단테 <신곡>의 지옥이 지상에 재현된 모습’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유럽의 구악으로 취급받은 이민자들은 정상적인 법의 보호보다 자경단의 주먹에 기대고 살아야 했다. 


아일랜드의 갱단에 이어 이탈리아의 마피아, 중국의 삼합회, 네덜란드의 페노제, 일본의 야쿠자 등이 자국의 이민물결에 실려 들어왔다. 뉴욕의 갱단들은 소방대원, 노조와 결탁하고 1920년대 금주시대에 밀주를 통해 거액을 마련한 후 정계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이민자들은 가톨릭에다 민주당 성향이라 남북전쟁 때 공화당인 링컨의 북군에 참전하기를 거부했다. 가톨릭 출신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된 케네디의 후원 그룹에 이민자의 마피아를 배제할 수가 없다.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오바마 대통령, 철강왕 카네기,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과 아놀드 슈워저네거,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테슬러의 일런 머스크, 세계은행 총재 김용 등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이민자이거나 그 자녀들이다.


 흔히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 미국이고, 미국을 움직이는 것이 유대인이라고 한다. 세계 인구의 0.2%에 불과한 유대인이 노벨상의 22%, 아이비 리그 교수의 30%, 미국 대법관의 3분의 1, 미국 부자 20명 중 8명이 유대인이다. 심지어 코미디언도 유대인이 가장 많다. 이처럼 정치, 경제, 언론, 문화 등 전 영역에서 유대인의 힘은 막강하다. 


 미국의 명문 아이비 리그의 대학입시에서 입학 사정관제를 도입한 것은 이른바 미국의 주류 상류층인 WASP(백인 앵글로 색슨의 신교도)가 시험 성적만으로는 유대인을 당할 수 없기 때문에 고안해 낸 방편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요즘 뉴욕에는 우리의 특목고에 해당하는 명문고 8개가 있는데, 전체 인구의 5% 정도밖에 안 되는 아시아계의 입학이 51.7%를 차지하고, 백인 27%, 히스패닉 7%, 흑인 5%에 그치자 아시아인에 대한 새로운 규제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방책이다. 

 뉴욕은 예루살렘 다음으로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다. 세계 최대의 유대교 성전 시나고그도 뉴욕에 있다. 뉴욕은 유대인이 움직이는 도시라고 해서 'Jew York'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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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11-29 11:5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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