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기사수정

연세대 객원교수, 철학박사





느 중학교 국어 교사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의 뜻을 간단히 풀이하라고 시험문제를 냈다. 잘 알려져 있는 속담이어서인지 학생들은 표현에 사소한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맞는 답을 썼다. 출제자가 생각한 모범답안, 즉 어떤 일을 하는 데 지도자가 너무 많으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쓴 것이다. 

 

그런데 교사를 당황하게 만드는 답안이 하나 나왔다. 한 학생이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불가능한 일도 이뤄낸다.”고 답한 것이다. 이 속담은 흔히 ‘사공이 많을 때의 폐해’를 꼬집을 때 인용된다. 하지만, 이 학생은 이 표현을 흔히 사용되는 맥락을 떠나 마치 처음 대하는 말인 것처럼 살펴보고 해석하였다. 


사공이 많다고 하니 그 많은 사공들에게 잠재된 힘을 온전히 결속시킬 수 있다면 배가 정말 산으로 가는 정도에 맞먹는 기적을 이룰 수도 있을 거라고 본 것이다. 어쩌면 이 학생은 이 속담의 속뜻을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탐구했고 그 결과 틀에 박힌 뜻풀이를 뛰어넘어 신선한 의미를 발굴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초등학교 교실에서 교사가 한 학생에게 물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지?” 그러자 금방 자신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그거야, 봄이 오지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가 교사가 염두에 둔 정답임은 물론이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자. 이 학생의 대답이 정말 황당한 오답일까? 그렇지 않다. 물이 꽁꽁 언 겨울이 지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봄이 온다! 얼마나 분명한 사실인가. 책이나 학교에서 가르쳐 준 정답을 고지식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틀렸다고 나무랄 수만은 없다. 건조한 단편적 지식보다 날씨가 따뜻해져서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데 언뜻 생각이 미치고 가슴이 설레는 이 소년의 풍부한 감성이 참으로 부러울 뿐이다. 그러니 냉철한 과학적 시각이 항상 감성적 시각보다 우월하다고 고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교회에서 예수 탄생을 소재로 한 연극을 했다. 그런 연극의 한 대목에서 벌어진 이야기다. 요셉과 마리아가 묵을 곳을 찾는 장면에서다. 초라하고 지친 요셉과 만삭의 마리아 역을 맡은 두 아이가 간절한 목소리로 “빈 방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각본에는 이런 대사 다음에 여관 주인 역을 맡은 소년이 “없어요!”라고 매몰차게 대답한 다음 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단하고 쉬운 단역이었다. 그런데 이 단역을 맡은 소년은,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더니 정을 담뿍 실은 목소리로 “예, 안으로 들어오세요. 사실은... 방이 있어요.”라고 해버렸다. 애절하게 사정하는 요셉 부부가 너무나 불쌍해 보여서 자신이 연극을 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엉뚱한 행동을 하고 만 것이다. 결국 연극의 줄거리가 상당히 달라져 버렸음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 어린 소년은 참으로 황당하고 엉망인 연기를 했다. 그런데 연극을 보던 그 자리의 많은 어른들은, 대사와는 전혀 다르지만 소년의 눈물 가득 고인 눈과 순진무구한 행동에 오히려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 단역 소년의 인간미 넘치는 감성, 자신이 지금 착실히 연극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깡그리 잊을 정도로 분출했던 그 뜨거운 연민의 감정은 우리의 메말라버린 감성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마도 이 소년은 연기자로서는 한심한 수준인지 모르나 인간적 감성으로 말하면 존경스러운 경지가 아닐까. 인간에게는 주어진 명령이나 각본에 충실히 따르는 자세보다 다정다감함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니까.

 

의외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생각 중의 한 가지는, 모든 문제에는 정답, 일종의 모범답안이 있고 그것도 딱 하나만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문제이든 그에 대한 관점 역시 하나밖에 없다고 여기는 고정관념 역시 사람들에게 집요하게 작용한다. 실제 세상 물정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면을 지니는 게 분명한데도 말이다. 

 

혹시 우리는 견고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사람이나 사물, 문제들에 관해 그것이 지닌 다채로운 얼굴이나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3-12-15 10:24:56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포토뉴스
확대이미지 영역
  •  기사 이미지 대학생 베트남 해외자원봉사 앞두고 사전 준비교육 가져
  •  기사 이미지 몽골 사막에 제2의 한국 세워졌다
  •  기사 이미지 DAC's Relief Efforts in Turkey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